정교 수용과 적응 과정
정교(러시아 정교회)로의 개종은 사실상 러시아 시민권 취득과 동일시되었으며, 한국인들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기독교화는 그들의 적응 과정에서 중요한 단계가 되었다. 성직자, 관리, 자선가들은 한국인 이주민들을 러시아 문화와 국가 체제에 통합시키는 방편으로 정교 신앙의 확산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
한국인들에게 새로운 신앙의 수용은 단순히 영적 의미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이익도 있었다. 정교 신자로 세례를 받은 한국인들은 토지를 비롯한 여러 시민적 권리를 부여받을 수 있었으나, 외국 신분을 유지한 사람들은 부유한 지주 밑에서 품팔이를 하거나 토지를 임차해야 했다.
그러나 정교로의 개종이 반드시 기존 신앙 체계의 완전한 포기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러시아 이주 이전의 한국 사회는 샤머니즘, 불교, 유교, 도교가 공존하는 종교적 다원성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에도 한국인들은 민족 고유의 신앙 요소를 일정 부분 유지했다. 정교 신앙은 한국적 전통성과 결합되며 점차 독자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연구자 T. V. 볼코바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한국인들은 주변 민족의 종교에 대해 중립적 태도를 취하였다. 가정생활에서는 여전히 유교적 윤리와 전통 신앙에 기반한 의례를 지켰지만, 타민족 사회에서는 이를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기독교화는 또한 이름 문화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세례를 받으면 한국인들은 러시아식 이름을 부여받았고, 이는 새 환경에서의 교류를 용이하게 만들었다. 연구자 B. D. 박은 1863–1864년의 기록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티진헤 마을의 촌장 최웅익은 세례를 받고 러시아 장교 대부의 이름과 부칭을 따라 ‘표트르 세묘노프’로 불리게 되었다.” 제정 시대의 한국인들 사이에는 ‘아쿨리나’, ‘유베날리’, ‘프라스코비야’, ‘메포디’와 같은 고풍스러운 러시아 이름들도 존재했다.
러시아식 이름 사용은 새로운 사회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실질적인 소통 수단이 되었다. 러시아 관리와 주민들에게 한국 이름은 발음하기 어렵고 기억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러시아식 이름이 교류를 원활하게 했다. 그러나 다수의 한국인들은 동시에 본래의 한국 이름도 유지하며 고유 문화를 잃지 않으려 했다.
정치적 활동과 민족 의식
19세기 후반, 열강들 간의 극동 지역 패권 경쟁이 격화되었다. 1904–1905년 러일전쟁에서의 러시아 패배는 일본의 세력 확대를 초래했고, 결국 1910년 조선 병합으로 이어졌다. 조선은 일본 제국의 총독부로 전락하였으며, 모든 조선인은 일본 국적을 강제로 부여받았다.
일본의 압박이 거세질수록 한국인들의 새로운 이주 물결이 발생했다. 러시아로 이주한 한국인들은 점차 시민적 자각을 가지게 되었고, 사회 단체와 무장 조직인 ‘의병(義兵)’을 결성하여 항일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극동 지역에서 활동한 주요 단체로는 1909년 결성된 ‘국민회(國民會, Kunkminhoe, 조선 국민회)’와 1911년 ‘권업회(勸業會, Kwonophoe, 근로 진흥회)’가 있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제정 러시아 정부는 정치 단체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고, 그들의 활동은 점차 중단되었다.
러시아의 패배는 사실상 조선 자주성의 마지막 보루가 무너진 사건이었다. 많은 이주민들에게 블라디보스토크는 ‘반(半)자치의 마지막 요새’로 남아 있었으며, 일본 식민 통치로부터의 구원을 상징하는 희망의 도시로 인식되었다.
한국인들의 항일운동 참여는 러시아 사회의 정치·사회적 삶으로의 통합을 촉진했다. 그들의 독립운동은 단순한 민족 해방의 차원을 넘어, 러시아 사회 내에서의 사회적 위치 확립과 자아정체성 형성의 과정이기도 했다.
산업 및 사회 생활 속의 한국인들
20세기 초, 러시아 전역에서 혁명적 분위기와 노동운동이 확산되었다. 산업 현장에서 일하던 한국인 노동자들도 이에 동참하며 러시아 노동자들과의 평등을 요구했다.
1906년 2월 13일, 팀프턴(Timpton) 금광 회사의 한국인 노동자 전원이 파업에 돌입했다. 그들은 러시아인 노동자와 동일한 식료 배급을 요구하며, ‘황인(黃人)’에 대한 차별적 조항의 철폐를 주장했다. 당시 한국인 노동자의 임금은 러시아인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인들은 점차 산업 생산에 적극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국가 및 민간 기업에서 일하며,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고 숙련 노동자로 성장했다. 교육을 받은 이들은 행정기관, 상업회사, 대기업 등에서도 근무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한국인 사회가 전통적인 농업 중심의 생활에서 근대적 산업 구조로 옮겨가는 과정을 의미했다. 그 결과, 러시아 내 한국인 공동체는 근면하고, 교육받으며, 사회 참여도가 높은 새로운 사회적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