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강제이주 이전의 한국인 소비에트화 시기
초기 소비에트화와 혁명기 한국인의 참여

러시아 내 한국인 디아스포라 발전의 다음 단계는 1917년 혁명과 볼셰비키의 집권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러시아 사회 전체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으며, 이는 한국인 공동체의 형성과 발전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 혁명은 단순한 정치 권력의 교체가 아니라, 경제·사회 관계의 심층적 전환—즉, 초기 자본주의적 경제 체제에서 사회주의적 형태로의 변화를 의미했다.

1917년부터 1937년까지의 시기는 **초기 소비에트화(소비에트화 초기 단계)**로 규정될 수 있다. 여기서 ‘소비에트화’란 새로운 이념, 세계관, 행정체계를 포함한 소비에트 권력의 확립 과정을 뜻한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볼셰비키의 이념을 지지했으며, 그 속에서 정의와 사회적 평등에 대한 희망을 보았다.

극동 지역 한국인들 사이에서 소비에트 이념이 인기를 얻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첫째, 볼셰비키는 토지 문제 해결을 약속했다. 이는 토지를 소유하지 못했던 한국인들에게 절실한 문제였다. 많은 이들이 ‘토지는 농민에게’라는 구호 속에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보았다.
둘째, 한국인들의 법적 지위는 불안정했다. 상당수 이주민들은 러시아 시민권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토지를 소유하거나 국가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셋째, 제정 러시아 시기에는 뚜렷한 민족적 불평등이 존재했으며, ‘모든 민족의 평등’을 내세운 소비에트 정권의 구호는 한국인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소비에트 국가의 형성은 1919년부터 1922년까지의 **내전(Гражданская война)**과 외국의 무력 간섭(인터벤션)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 시기 러시아의 대부분 한국인들은 볼셰비키를 지지했으며, 그들의 승리를 통해 조국(한국)이 일본 식민지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극동 지역의 내전기 동안, **적군 유격대(붉은 군대의 유격 부대)**와 한국인 항일 게릴라 부대의 활동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특히 **한창걸(Хан Чан Гер)**이 이끈 **한국인 유격대(한창걸의 한국인 유격대)**는 붉은 군대와 협력하여 일본군과 백군 세력에 맞서 싸웠다. 한국인 게릴라들은 소비에트 정권을 반일 투쟁의 동맹자로 인식하고, 조국 해방의 이상을 공유하였다.

극동의 붉은 군대는 백군(白軍)의 잔여 세력과 민족주의 정권뿐 아니라, 백군을 지원하던 17만 5천 명 규모의 일본군과도 대치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볼셰비키와 한국인 모두에게 공통의 적이었다.

연해주 지역의 한국인 유격대에게 있어 일본군 간섭군과의 전투는 단순한 러시아 내전 참여를 넘어 민족 해방 투쟁의 연장선이었다. 이 시기 소비에트 정권은 그들에게 반일 저항의 상징이자 조국 해방의 희망으로 인식되었다.
한창걸의 한국인 유격대
한국인 유격 운동

극동 지역에서 전개된 한국인 유격 운동은 매우 큰 규모를 보였다. 연해주와 아무르 지역 곳곳에서 36개의 한국인 유격대가 활동했으며, 그 인원은 약 3,700명에 달했다. 한국인들은 독자적인 민족 부대뿐 아니라 러시아인과 함께 편성된 혼성 유격대에도 참여하였다. 이러한 혼성 부대에서 한국인들은 러시아 유격대원들의 일상과 문화를 직접 경험하며 그들의 언어, 문화적 요소, 정치적 의식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백군과 일본군 간섭군에 맞서 함께 싸우는 과정은 적군 부대 안의 여러 민족들 사이에서 강한 연대감과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였다.

높은 수준의 자원 동원과 적극적인 항일 투쟁 참가를 통해 극동 지역의 한국인 유격 운동은 민족적 반일 의식의 고양소비에트 권력과의 연대 강화로 이어졌다.

법적 지위의 해결과 초기 개혁

1917년 이후 소비에트 이념은 전체 인구 속에서 빠르게 확산되었고, 한국인 사회도 그 영향을 받았다. 이들 한국인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 중 하나는 시민권 문제였다. 소비에트 정부가 제정한 일련의 법적 조치들은 이 문제를 단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 1923년: 시민권 신청자 6,000명 중 1,300명만 승인
  • 1924년: 4,761명 중 1,247명 승인
  • 1925년: 3,265명 중 2,200명 승인
  • 1926년 10월 1일 기준: 총 18,474건 중 12,783건 승인
소비에트 정부는 또한 전통적 조선 사회에서 수 세기 동안 해결되지 못했던 문제—특히 성별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려는 개혁을 추진했다.

여성의 지위 변화와 가족 구조의 변모

소비에트 교육 제도와 **문맹 퇴치 운동(ликбез)**의 전개는 한국인 여성들에게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이는 여성들이 처음으로 남성과 동등하게 교육받을 수 있게 된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전통적 한국 가정에서 여성에게 부여되었던 종속적·보조적 역할을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의 가부장적 가족제도에서 남성은 절대적 권위를 가졌고, 여성은 순종, 단정한 행실, 가사노동에 제한되어 있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과거의 잔재"와의 투쟁을 강조하며 전통적 결혼·가족 제도의 단순화와 재편을 추진했다. 소비에트 가족은 ‘국가의 기본 단위’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사회주의적 가족 형태를 구축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법적으로 보장된 남녀 평등 원칙은 한국인 사회의 가족관계와 성 역할 구조 변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여성들은 사회·정치 활동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중 **안나 표트로브나 김-스탄케비치(Анна Петровна Ким-Станкевич)**는 초기 혁명운동에 참여한 최초의 한국인 여성 활동가 중 한 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교육과 러시아화

문맹 퇴치와 러시아어 습득 문제 해결에서 교육 제도는 핵심적 역할을 했다. 학교는 한국인 사회의 계몽과 문화적 통합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가장 논쟁적이었던 문제는 수업 언어였다. 급진적 개혁 지지자들은 전면적인 러시아어 교육 도입을 주장하며, 이를 통해 한국인 아동들에게 대학 진학과 사회적 성장의 기회를 보장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한국인들은 러시아어 없이는 당이나 행정기관에서 승진하거나 정치·사회 활동에 참여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어 중심 교육으로의 전환은 객관적 필요와 한국인들의 주관적 요구가 함께 작용한 결과였다.

1925년까지 한국인의 문해율은 **21.8%**에 도달했는데, 이는 러시아인보다 낮았지만 매우 큰 진전이었다. 1930년대 중반까지 교육 성과는 크게 향상되었으며, 그 결과 한국 사회 내에는 교육·문학·예술·학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민족 인텔리겐치아가 형성되었다.

한국인 교육과 문화 발전

1937년 강제이주 이전까지 극동 지역의 한국인들은 모국어 교육의 권리를 보장받았다. 한국어로 운영되는 초등학교, 중등학교, 기술학교, 사범학교, 대학 예비과정(рабфак), 그리고 고등교육기관의 한국어 분과가 존재했다.

1931/32 학년도 극동 지역에는 380개 학교가 운영되었고, 33,595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었다. 이는 전체 학교 연령대 한국인 아동의 **85.5%**에 해당한다.

1931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조선인 사범학교(Корейский педагогический институт)**가 설립되었으며, 780명의 학생이 입학하였다.
1933/34 학년도까지 이 기관은 217명의 교원을 배출했고, 여러 학과에서 234명의 학생이 수학하고 있었다.

라디오와 대중 방송의 시작

극동 지역의 계몽 활동은 학교 교육뿐 아니라 새로운 대중 매체인 라디오 방송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1925년 1월, 극동혁명위원회(Дальревком)는 지역 라디오 방송국 건설을 결정하였다.
같은 해 12월 25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첫 번째 시험 방송이 송출되었다.

1934년 1월 5일, 연해주 지방 집행위원회는 라디오 송신과 방송 기능을 통합하여 **연해주 지방 라디오위원회(Приморский областной радиокомитет)**를 설립하였다.

1934년 8월 방송 편성표에 따르면, 소수민족 방송(«нацменвещание»)은 저녁 18:50~19:00의 짧은 시간에 편성되었다.

그러나 12:35~12:55의 ‘근로자 점심 방송’ 시간대에는 더 긴 편성이 이루어졌으며, 한국어와 중국어 방송이 번갈아 가며 운영되었다.
연해주 지방 라디오위원회 한국어 방송부 직원들. 블라디보스토크, 1937년.
한국인 유격 운동

극동 지역에서 전개된 한국인 유격 운동은 매우 큰 규모를 보였다. 연해주와 아무르 지역 곳곳에서 36개의 한국인 유격대가 활동했으며, 그 인원은 약 3,700명에 달했다. 한국인들은 독자적인 민족 부대뿐 아니라 러시아인과 함께 편성된 혼성 유격대에도 참여하였다. 이러한 혼성 부대에서 한국인들은 러시아 유격대원들의 일상과 문화를 직접 경험하며 그들의 언어, 문화적 요소, 정치적 의식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백군과 일본군 간섭군에 맞서 함께 싸우는 과정은 적군 부대 안의 여러 민족들 사이에서 강한 연대감과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였다.

높은 수준의 자원 동원과 적극적인 항일 투쟁 참가를 통해 극동 지역의 한국인 유격 운동은 민족적 반일 의식의 고양과 소비에트 권력과의 연대 강화로 이어졌다.

법적 지위의 해결과 초기 개혁

1917년 이후 소비에트 이념은 전체 인구 속에서 빠르게 확산되었고, 한국인 사회도 그 영향을 받았다. 이들 한국인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 중 하나는 시민권 문제였다. 소비에트 정부가 제정한 일련의 법적 조치들은 이 문제를 단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 1923년: 시민권 신청자 6,000명 중 1,300명만 승인
  • 1924년: 4,761명 중 1,247명 승인
  • 1925년: 3,265명 중 2,200명 승인
  • 1926년 10월 1일 기준: 총 18,474건 중 12,783건 승인
소비에트 정부는 또한 전통적 조선 사회에서 수 세기 동안 해결되지 못했던 문제—특히 성별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려는 개혁을 추진했다.

여성의 지위 변화와 가족 구조의 변모

소비에트 교육 제도와 **문맹 퇴치 운동(ликбез)**의 전개는 한국인 여성들에게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이는 여성들이 처음으로 남성과 동등하게 교육받을 수 있게 된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전통적 한국 가정에서 여성에게 부여되었던 종속적·보조적 역할을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의 가부장적 가족제도에서 남성은 절대적 권위를 가졌고, 여성은 순종, 단정한 행실, 가사노동에 제한되어 있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과거의 잔재"와의 투쟁을 강조하며 전통적 결혼·가족 제도의 단순화와 재편을 추진했다. 소비에트 가족은 ‘국가의 기본 단위’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사회주의적 가족 형태를 구축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법적으로 보장된 남녀 평등 원칙은 한국인 사회의 가족관계와 성 역할 구조 변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여성들은 사회·정치 활동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중 **안나 표트로브나 김-스탄케비치(Анна Петровна Ким-Станкевич)**는 초기 혁명운동에 참여한 최초의 한국인 여성 활동가 중 한 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교육과 러시아화

문맹 퇴치와 러시아어 습득 문제 해결에서 교육 제도는 핵심적 역할을 했다. 학교는 한국인 사회의 계몽과 문화적 통합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가장 논쟁적이었던 문제는 수업 언어였다. 급진적 개혁 지지자들은 전면적인 러시아어 교육 도입을 주장하며, 이를 통해 한국인 아동들에게 대학 진학과 사회적 성장의 기회를 보장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한국인들은 러시아어 없이는 당이나 행정기관에서 승진하거나 정치·사회 활동에 참여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어 중심 교육으로의 전환은 객관적 필요와 한국인들의 주관적 요구가 함께 작용한 결과였다.

1925년까지 한국인의 문해율은 **21.8%**에 도달했는데, 이는 러시아인보다 낮았지만 매우 큰 진전이었다. 1930년대 중반까지 교육 성과는 크게 향상되었으며, 그 결과 한국 사회 내에는 교육·문학·예술·학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민족 인텔리겐치아가 형성되었다.

한국인 교육과 문화 발전

1937년 강제이주 이전까지 극동 지역의 한국인들은 모국어 교육의 권리를 보장받았다. 한국어로 운영되는 초등학교, 중등학교, 기술학교, 사범학교, 대학 예비과정(рабфак), 그리고 고등교육기관의 한국어 분과가 존재했다.

1931/32 학년도 극동 지역에는 380개 학교가 운영되었고, 33,595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었다. 이는 전체 학교 연령대 한국인 아동의 **85.5%**에 해당한다.

1931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조선인 사범학교(Корейский педагогический институт)**가 설립되었으며, 780명의 학생이 입학하였다.
1933/34 학년도까지 이 기관은 217명의 교원을 배출했고, 여러 학과에서 234명의 학생이 수학하고 있었다.

라디오와 대중 방송의 시작

극동 지역의 계몽 활동은 학교 교육뿐 아니라 새로운 대중 매체인 라디오 방송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1925년 1월, 극동혁명위원회(Дальревком)는 지역 라디오 방송국 건설을 결정하였다.
같은 해 12월 25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첫 번째 시험 방송이 송출되었다.

1934년 1월 5일, 연해주 지방 집행위원회는 라디오 송신과 방송 기능을 통합하여 **연해주 지방 라디오위원회(Приморский областной радиокомитет)**를 설립하였다.

1934년 8월 방송 편성표에 따르면, 소수민족 방송(«нацменвещание»)은 저녁 18:50~19:00의 짧은 시간에 편성되었다.

그러나 12:35~12:55의 ‘근로자 점심 방송’ 시간대에는 더 긴 편성이 이루어졌으며, 한국어와 중국어 방송이 번갈아 가며 운영되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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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김 G.Н.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의 한국인 계몽의 역사…』(История просвещения корейцев России и Казахстана...), pp. 121–122.
  11. 텐 Я. 『소련의 한국인들』(Тен Я. Корейцы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 혁명과 민족들(Революция и национальности). 모스크바, 1935, № 7, p. 48.
  12. 박 B.Д. 『소비에트 러시아의 한국인들 (1917–1930년대 말)』(Пак Б.Д. Корейцы в советской России (1917 – конец 30-х годов)). 모스크바–이르쿠츠크–상트페테르부르크: Иркутский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педагогический институт, 1995, p. 143.
  13. 김 G.Н. 『카자흐스탄 한국인의 인명학: 전통과 혁신』(Традиции и инновации в антропонимии корейцев Казахстана) // http://world.lib.ru/k/kim_o_i/t56.shtml
  14. 자리르가시노바 Р.Ш. 『중앙아시아와 카자흐스탄 한국인의 민족 과정의 주요 경향』(Основные тенденции этнических процессов корейцев Средней Азии и Казахстана) // 중앙아시아와 카자흐스탄 민족 집단의 민족 과정(Этнические процессы...). 모스크바: 나우ка(Наука), 1980, p. 57.
  15. 코즐로프 V.И. 『민족과 경제. 민족적·경제적 공동체』(Козлов В.И. Этнос и экономика. Этническая и экономическая общности) // СЭ, 모스크바, 1970, № 6, p. 49.
  16. 참조: 김 G.Н.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의 한국인 계몽의 역사…』(История просвещения корейцев России и Казахстана...), p. 102.
  17. 1932년 9월 기준 극동 지역에는 183개의 한국인 집단농장(колхоз)이 있었고, 이들에는 9,756가구가 포함됨.
  18. 홉스봄 Э. 『격변의 시대: 짧은 20세기 (1914–1991)』(Хобсбаум Э. Эпоха крайностей). 모스크바: Независимая Газета, 2004, pp. 405–406.
  19. 김 승 화. 『소련 한국인 역사 에세이』(Ким Сын Хва. Очерки по истории советских корейцев). 알마-아타: Наука, 1965, p. 181.
  20. 라흐만쿨로바 А. 『우즈베키스탄 한국인의 계몽과 교육 문제(이주 이후부터 현재까지)』.
  21. 텐 M.Д. 현지조사 자료 — 인터뷰, 타슈켄트 지역 «연고치꼴리» 마을, 2009–2010년 (Материалы полевых исследований Тена М.Д., интервью 2009–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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